"촛불 대신 응원봉 들고"...'尹 탄핵' 집회 현장을 바꾼 K팝 아이돌 응원봉 화력
하이뉴스 2024-12-09
"촛불 대신 응원봉 들고"...'尹 탄핵' 집회 현장을 바꾼 K팝 아이돌 응원봉 화력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K팝 2세대 대표 걸그룹 '소녀시대'의 진가는 음악이 곡과 멤버들에 배인 정서 그리고 이것이 퍼포먼스와 만났을 때다.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작사 김정배·작곡 켄지)는 특히 감성적인 멜로디와 희망 찬 노랫말, 소녀들의 자연스런 결의가 과감한 발차기와 만나 안기는 쾌감이 대단했다.
특히 지난 2016년 이화여대의 학내 시위 현장에서 투쟁가 대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퍼진 건 대중음악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조명이 됐다. 아이돌이 단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다. 혹자는 '다시 만난 세계'에 대해 '젊은 세대의 아침이슬'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정치(政治)적인 노래는 아니지만, 정치는 본디 정치(定置)해야 하는 것.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제자리(定置)에 두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 만난 세계'라는 맥락과 맞물린다.
2020년 총리 퇴진과 왕실 개혁 등을 요구하며 태국에서 진행된 반정부 시위 속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퍼졌다. 세계 젊은 세대의 저항가가 된 셈이다.
최근 여의도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사태로 촉발된 윤 대통령의 탄핵 촉구 집회에서 이 곡이 다시 울려 퍼졌다. 특히 젊은층에서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이라고 목놓아 불렀다.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 에스파 '위플래시', H.O.T 혹은 NCT 드림 '캔디', '아파트' 신·구축인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 샤이니 '링딩동', 세븐틴 부석순 '파이팅 해야지', 지드래곤 '삐딱하게', god '촛불하나' 등 플레이리스트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곡들을 떼창하는 20대, 30대 여성들은 촛불 대신 각자 좋아하는 K팝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었다.
뉴욕타임스와 AFP통신 등 외신들은 추위 속에서도 많은 참가자들이 K팝 콘서트에서 사용한 응원봉을 흔들며 K팝 댄스파티를 연상케 하는 시위문화를 선보였다고 보도했다.
응원봉 문화의 탄생
'사랑니봉'(소녀시대), '뱅봉'(빅뱅), 아이크(아이유), '샤팅스타'(샤이니), '아미밤'(방탄소년단), '김반봉'(레드벨벳), 유리구슬봉(여자친구), '캐럿봉'(세븐틴), '믐뭔봄'(NCT), '뿅봉'(블랙핑크), '나침봉'(스트레이 키즈), '스봉이'(에스파), '아이해봉'(아이브), '핌봉'(르세라핌), '빙키봉'(뉴진스), '덤벨봉'(플레이브)…
주로 애칭봉으로 불리는 응원봉 문화는 K팝 2세대 팬덤문화부터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K팝 1세대 팬덤문화에선 응원색이 생겼다. 'H.O.T.'의 흰색(펄 화이트), '젝스키스'의 노랑, 'S.E.S'의 펄 보라, '핑클'의 펄 레드, '신화'의 주황, 'god'의 하늘색 등이었다. 근데 팬덤은 이때 해당하는 풍선을 들었다. 이후 발광봉을 잠시 거쳐 우리가 아는 응원봉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룹뿐 아니라 팬덤들도 자의·타의로 차별화를 원했고 응원봉이 그 표현수단 중 하나가 됐다.
업계에선 현재 3D 입체 응원봉의 시초는 2세대 대표 보이그룹 '빅뱅'의 '뱅봉'이라고 본다. 뱅봉의 초기 버전은 빅뱅 리더인 지드래곤이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근 빅뱅 멤버 대성의 유튜브 채널 '집대성'에 빅뱅 멤버들이 출연해 해당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자 빅뱅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 선배였던 가수 세븐이 "최초는 7봉(세븐의 응원봉)"이라고 정정에 나섰는데, 7봉은 입체봉이라기보다 발광봉의 변형에 가깝다.
집회에 아이돌 응원봉이 등장한 이유
응원봉은 우선 집회문화에서 촛불을 대신할 수 있는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휴대성이 좋은 데다 발광력이 강력하다. 일부 시위 참가자는 어두운 가운데도 응원봉을 옆에 놓으면 시험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배터리를 완충하면 7시간 안팎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바람이 부는 겨울에 촛불은 쉽게 꺼지거나 위험한데, 응원봉은 그럴 걱정이 없다.
무엇보다 응원봉은 주체성의 상징이다. 사실 K팝은 마니아 문화로 출발했다. 자신이 특정 그룹의 팬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K팝 아이돌이 국위선양의 상징이 되고(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 한국의 두 얼굴을 계엄이 드러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팬들 역시 취향을 적극 드러냈다.
특히 3세대 K팝 아이돌부터는 멤버들과 팬덤의 2인3각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대형 기획사 소속이든, 중소기획사 소속이든 데뷔 즉시 혹은 연습생 때부터 멤버들과 팬들은 긴밀히 소통하며 서로 주체성을 투영하기 시작했다. 유대감이 만들어진 것이다.
팬들은 그래서 자신과 본인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모두 좀 더 나은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됐고, 사회 문제도 더 들여다 보게 됐다. 정치적인 사안에도 목소리를 내게 된 이유다. 응원봉은 이번에 팬심의 목소리뿐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까지 대변하게 됐다.
아울러 K팝 아이돌 음악은 태생과 확산부터 국내외 소수자들의 연대에서 출발했다.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 황금기에서 작품성 없는 음악 취급을 받았고, 처음 해외에서 주목을 받을 때는 소수 마니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창구로 삼았다.
K팝은 다양한 인종이 뭉친 팬덤의 연대 게릴라 활동을 통해 퍼져나갔고, 이제 주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음악이 됐다. 이번 여의도 집회에선 '전국 응원봉 연대'가 생겨났고 이 자리에서 다양하고 수많은 응원봉이 상봉했다. 응원봉이 연대의 고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뉴진스 팬덤 '버니즈'인 20대 회사원 정수민 씨는 "요새 이래저래 힘든 일이 많았는데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런데 여의도 응원봉들 사이에 있으니 마음이 나도 모르게 평안해지더라. 응원봉은 우리에게 깃발과 같다"고 말했다.
8일 집회 현장에서 중장년층을 위해 응원봉에 대해 강의하는 콘텐츠도 마련됐다. 일부 중장년은 자신의 자녀가 좋아하는 그룹 응원봉을 중고시장에서 구매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이렇게 집회 문화 콘텐츠가 새로 생겼다.
K팝 응원봉은 이미 해외에 소개됐다. 170년 역사를 지닌 영국 빅토리아앤앨버트(V&A) 박물관이 2022년 전시 '한류! 코리안 웨이브(Hallyu! The Korean Wave)'를 열었는데 약 20 팀의 응원봉이 내걸려 K팝 아이돌 팬덤 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올해 '2024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이 입장할 때 들고 있었던 디지털 플래그인 '팀코리아 응원봉'은 K팝 응원봉을 응용한 것으로 방탄소년단 등이 속한 하이브가 제작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응원봉은 이번 여의도를 기점으로 집회문화에서 최고봉으로 떠올랐다. 현장의 쓰레기 등을 정리할 때 앞장선 이들도 K팝 팬덤이었다. 응원봉까지 들고 있는데 우리 최애 명성에 먹칠을 할 수 없다며 솔선수범했다.
이처럼 아이돌 팬덤의 최애와 나라 사랑은 국회의원들의 그것보다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