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공포 수준"...서울대 박사가 일가족 데리고 월북한 오길남 사건 '소름 돋는 결말'
하이뉴스 2025-05-30

"공산주의의 공포 수준"...서울대 박사가 일가족 데리고 월북한 오길남 사건 '소름 돋는 결말'
1985년, 독일. 유학 중이던 한인 경제학자 오길남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북한으로 오라. 조국이 너를 원한다."
당시 북한 외무성의 문화 공작원들은 오길남에게 교수직 보장, 아내 치료비 지원, 외교적 대우를 약속했다. 그는 흔들렸다. 심지어 아내 신숙자 씨는 루푸스(난치병) 투병 중이었다. 그러나 북한 측은 “평양의 병원에서 무료 치료가 가능하다”며 결정적인 회유를 던졌다.
공작원의 제안에 혹한 오길남 박사는 이를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신숙자 여사는 "당신 혼자 가고 정 괜찮다 싶으면 나중에 우리를 데려가라"고 말하며 반대 의사를 내비치지만 오길남 박사는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신숙자 여사는 "훗날 당신의 이 선택이 우리에게 큰 불행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경고와 함께 오길남 박사의 입북에 동행했다.
그 해 11월, 오길남은 아내와 두 딸(혜원·규원)을 데리고 평양으로 향했다. 지옥의 문은 그렇게 열렸다.
북한에서의 삶은 아내의 생각대로 불행했다. 1985년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초대소에 보내진 오길남 박사와 가족들은 3개월간 사상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보내진 아파트는 평양 시내에 있긴 했지만 전력난에 시달렸다. 1930년대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다. 오길남 박사는 "북행을 결정한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짓이었다"고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북한 입국 직후 그를 맞이한 건 의료진도 교수 임용도 아닌, 엄중한 감시와 사상 교육이었다.
함경북도 나선시의 김책대학으로 발령은 났지만, 강의는커녕 사상 교양과 반미·반자본주의 세뇌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북한은 오길남 박사를 칠보산 연락소 내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대남방송 요원으로 일하게 했다. '구국의 소리'란 대한민국 국민, 친북주의자들을 사상교육 하기 위해 북한이 만든 대남방송을 뜻했다.

아내 신숙자 씨의 치료는 제대로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주거지인 '외국인용 아파트'는 감시 카메라와 녹음기로 철저히 통제됐다. 수시로 출입이 금지됐고, 아이들은 외출조차 제한받았다.
오길남은 점점 깨달았다. “우리는 포로였다.”
15년간 고생해 딴 박사 학위가 아무 소용이 없어진 삶에 오길남 박사의 후회가 극에 달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이 오길남 박사에게 서독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둘을 덴마크로 유인해 데려오라는 대남공작원 지령을 내린 것.
이를 오길남 박사가 아내에게 말하며 고민하자 아내는 "당신 혼자 나간 다음 어떻게서든 우리를 꺼내려 노력하라"는 말과 함께 혼자서라도 도망칠 것을 권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내는 “한 명이라도 나가야 한다. 당신이 도망쳐서 세상에 이 현실을 알려라”고 했다.

결국 오길남 박사는 코펜하겐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박사학위증 사본과 '도와달라'고 영어와 독일어로 쓴 쪽지를 은밀히 공항 직원에게 건네며 입북 1년 만에 극적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서독으로 이동한 오길남 박사는 북한 활동을 비밀로 하고 한국으로만 가지 않으면 북한이 아내와 딸을 풀어줄 거라고 가볍게 판단했다.
그러나 북한에 남겨진 신숙자 씨와 두 딸은 곧바로 숙청됐다.
북한은 “배신자의 가족”으로 낙인찍었고, 이들은 곧 평양에서 사라졌다. 이후 함경북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곳은 생존율이 30%도 되지 않는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이 높다.
탈북 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론 앞에 나서지 않았고, 가족의 생사도 외면했다.
하지만 2011년, 그는 마침내 책 『나는 마지막 증인이다』를 통해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든 지옥, 거기서 나만 빠져나왔다”

이 사건은 단순한 탈북 스토리가 아니다. 그의 이 자백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다.
"왜 혼자 도망쳤냐",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 "가족을 담보로 정치 도박을 벌인 거냐"는 공분과 혐오가 뒤섞였다.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 사회도 움직였다.
2012년,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와 UN은 신숙자 씨 모녀의 생사 확인을 북한에 공식 요청했다. 국회 청문회도 열렸고, 전 세계 시민단체가 수용소 사진과 위성 영상을 분석해 ‘실제 수감’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끝내 “그런 인물은 없다”고 부인했다.
한국 정부는 생존 여부를 수차례 확인했지만, 북한은 철벽이었다.
오길남의 탈북은 개인의 자유가 아닌, 가족의 인생을 담보로 얻은 ‘반쪽짜리 탈출극’이었다.
해당 사건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되게 되는데 바로 배우 이범수 주연의 영화 '출국'이다.

사연을 접한 네티즌들은 "부인은 월북을 엄청 반대했다고 했는데, 혼자만 탈북하라고 했다고? 말이 안 된다. 백프로 거짓말이다" , "일말의 책임감이라는 게 있었다면 혼자 탈북하지 않고 가족을 지켰어야 했다" , "공부만 열심히 하고 사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스라이팅 당해 저렇게 되는 것이다" , "진짜 너무 끔찍한 실화 사건이다" , "남겨진 부인과 딸들은 무슨 죄냐. 수용서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 "딸들이 죽을 때까지 원망해도 할 말 없다"등의 비난을 보냈다.
세상은 그를 ‘이념의 순교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와 두 딸을 제물로 바친 자기합리화의 상징으로 본다. 오늘도 그의 이름은 도덕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것은 이념의 맹신이 가족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악의 윤리적 파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