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카드 내밀던 이국종을 모두 무시했는데" 이국종 교수가 세계적인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눈물나는 사연
하이뉴스 2024-06-28
“내가 크면 아픈 사람에게 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으리라”
북한군 귀순병사를 살려낸 이국종 교수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다짐했던 말이다.
이국종 교수는 의사가 되기로 한 이유가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 유공자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 국가유공자 가족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세상은 장애인의 대한 편견이 좋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병신의 아들’이란 손가락질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아버지는 약주를 하면 아들 이국종의 손을 잡고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이국종에게는 6·25 참전용사란 영광보다 상처가 컸었다.
이국종 교수는 한 매체의 인터뷰를 통해 ‘의사가 된 계기’에 대해 언급했다. 바로 어린 시절 동네에서 잘 해준 의사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그는 중학생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았고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한 이국종은 국가 유공자 가족의 의료복지 카드를 내밀었다.
이를 본 간호사의 반응을 싸늘한 표정으로 다른 병원에 가라고 짜증을 냈다고 한다. 이국종교수는 다른 병원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했고, 결국 어린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됐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감학산 외과'라는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복지 카드를 내밀자 자신에게 일반 환자와 같은 대우를 해줬다. 이국종은 그에 감사하면서도 의문을 갖고 "왜 저를 일반 환자와 똑같이 대해주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의아해하며 "그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라고 답했고, 되려 본인부담금도 안 받고 이국종에게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라고 말하며 용돈까지 주었다고 한다.
어린 이국종 교수의 눈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김학산 의사 선생님의 성품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심껏 치료를 해주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다. 그날 이후 마음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고, 그분과 같은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이국종 교수는 대학시절 그의 집안이 무너지면서 값비싼 학비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다. 가난한 의대생은 한창 의술을 배워야 했지만 결국 해군 일반병으로 징집되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을 것이다. 바다에서 얻은 경험이 수많은 사람이 살리게 될 줄을.
그는 학교로 돌아가 전공의를 마쳤지만, 당시 IMF로 인해 그를 위한 취업자리는 없었다. 학교의 돈줄이었던 모기업이 무너져 의사들은 구조조정 당하고 또 제각기 흩어졌다.
인턴이었던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심각한 손상을 입은 중증 환자를 치료하는 외과분야인 ‘외상외과’를 제안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허무한 죽음이란 것을 목격하게 된다. 살릴 수 있었음에도 ‘골든타임’을 놓쳐버려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환자들은 자꾸 눈앞에서 죽어나가기만 했고 살려야 했으나 그는 살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함께 수술할 의사와 간호사, 중환자실은 언제나 부족했다. 병원들은 환자 받기를 거부했으며 받더라도 그 절차는 복잡하기만 했다.
당시 정부와 부처는 무관심했고 병원은 무책임했으며 국민들은 중증외상에 대해 무지했었고, 이미 죽음을 입고 도착한 외상환자들을 본 이국종은 외상환자를 보며 좌절과 무기력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선진 의료시스템을 도입해야겠다” 라며 느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환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면 좀 ‘더 가까이’ 환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선진 외상의료 시스템의 정착’에 대한 방도를 모색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며 선진국의 중증외상 의료체계를 지켜봤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병원들의 시스템은 유기적이었으며 투명하고 체계적이었다.
어느 곳이라도 헬기를 띄울 수 있으며, 그 어떤 곳이라도 헬기를 내릴 수 있기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환자에게 다가갈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정부 또한 그에 걸맞는 처우를 다해 인력과 장비, 기술, 지원은 전혀 아낌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국종은 그 시스템을 국내에 이식하고자 했다.
그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설파했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속한 병원에서는 굳이 외상환자를 위해 힘들게 헬기를 띄우고 치료할 이유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병원 측에선 돈도 안되고 환자는 더 이상 환자로서 환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외면할 수 없던 이국종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환자는 돈 낸 만큼 치료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합니다”
생사가 오가는 환자들이 넘쳐났고 살인적인 업무량에 10만 명이 넘는 의사들은 그 누구도 외상외과에 자원하지 않았다. 어느 의사는 집무실에서 일하다가 과로로 숨을 거두고 그나마 있던 의사들은 떠나고 버티던 간호사들은 근무 중 실신을 했다.
주민들은 헬기가 뜰 때마다 시끄럽다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의사 동료들은 이국종 의사를 손가락질하거나 수근덕거렸고 커뮤니티에서 그를 ‘꼴통’이라며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사실 이국종 의사는 말 안 듣는 의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 앞에서 침묵하는 구조헬기와 달리 당장 배는 가라앉는데 다들 뒷짐만 지고 있다며 저 혼자만 헬기를 띄워 아등바등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터졌을 때 2시간도 안돼 거의 모든 구조헬기가 단번에 날아와 구조에 협조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화물선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피랍당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UDT의 활약으로 선원들을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출 과정에서 소말리아 해적은 석해균 선장에게 여섯 발의 총알을 쏴버렸고, 이국종 의사는 선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구출 작전을 도왔다.
선장의 상태는 심각했다. 총탄 파편이 폐와 간, 내장을 찢겨놔 장기가 서로 엉겨 붙었으며, 팔다리는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바다를 건너 도와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소식을 전해 들은 이국종 의사는 그는 “몸에선 괴사가 일어났고, 상황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한국으로 데려와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라며 즉시 석해균 선장을 살리기 위해 팀을 꾸렸다.
그가 속한 병원에선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선장을 살려내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36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낯선 땅에는 온몸이 부풀어 오른 선장이 있었다. 이국종 의사는 죽음 속에서 표류하던 선장을 겨우 숨만 이어 붙여 국내로 이송해 왔다. 그리고 석해균 선장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이 영화 같던 장면에 언론은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국민들은 해적을 소탕하고 선장과 선원을 구해낸 감동 스토리에 열광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받던 ‘중증외상외과’에 대한 관심도도 예전보단 높아지면서 열악한 의료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지만 결국 묻히고 말았다.
정치인들은 이미지를 위해 이국종 의사를 정치판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대학병원은 자신들이 선장을 살려낸 양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렇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더 많은 방송에 출연해 현실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듯 보인 이국종 교수는 환자만 생각하다 보니 가족도, 자기 자신도 늘 뒷전이었고 남을 생각하는 이타심이 참 이기적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부정맥이 찾아오게 된다. 왼쪽 눈은 과로로 망막이 파열돼 더 이상 빛이 보이지 않아 실명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일 죽음과 만나지만, 삶의 희망을 놓아선 안됩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지킬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찾아온 환자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더 많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그의 이름은 의사 ‘이국종’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의 바람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이뉴스 / 정시은 기자